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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여든 여섯 번의 삶을 만나다

상세 내용 글쓴이, 독자대상, 서명, 저자/역자, 출판사, 페이지수, 출판일, 등록일
글쓴이 칠암도서관_사서 이지아
독자대상 성인
서명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저자/역자 브라이언 와이스 지음; 김철호 옮김
출판사 김영사
페이지수 350쪽
출판일 2019. 2. 20
등록일 2019년 07월 22일

여든 여섯 번의 삶을 만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다른 책의 한 대목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역사상 귀신을 본 사람이 100만 명이라고 가정해보자. 이것도 굉장히 보수적으로 낮게 잡은 수치다. 그리고 이들 중 99.99%의 사람들은 모두 망상을 보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낸 거라고 가정하자. 99.99%정도면 꽤 높게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기록이 남아 있는 지난 5000년의 역사를 통틀어 사후세계를 목격한 사람은 총 100명(100만 명의 0.01%)이다. 그러나 사후세계가 존재함을 증명하려면 단 한 명의 목격자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사후세계를 본 사람이 100명 존재한다면 필요한 증거의 100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후세계가 없다면 이는 자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사망 이후에도 보존되지 않는다면, 왜 우리 중 일부는 최면을 통해 전생을 경험하는가?
<산수의 감각/ 조지 셰프너, 222~223>

종교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은근히 우리는 육체 이상의 존재이고 삶이 끝난 이후에도 영혼이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죽음이 곧 소멸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알던 친구도 그랬습니다. 그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태어난 이상 지금 죽기는 싫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돈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큰 소리 치던 친구였습니다(여담이지만 정말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사후세계를 무조건 믿는 것도 비이성적이지만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그의 말도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명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현재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는 공통의 고뇌 아래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비겁한 공감을 나누며 하루하루 삶을 살기도 하고, 먼 꿈이나 구체적인 이상을 가지고 부지런히 정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잠깐 눈을 돌려서 이 삶 말고 다른 삶을 생각해봅니다. 타인의 삶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머물렀던 다른 몸, 다른 인생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것은 『산수의 감각』에서 기술한 바처럼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고, 심지어 누군가의 가까운 사람이 사후 세계의 존재를 보았다는 목격자일 수도 있습니다. 일명,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일관된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 영혼은 둥둥 떠서 죽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따뜻한 존재에게 감싸이는 듯한 느낌과 하얀 빛을 목격한다는 이야기 등이지요. 사람이 막 죽은 후에 몸무게를 쟀더니 정확히 21그램이 줄어들었다는 (1)21그램 가설을 주장한 과학자 덩칸 맥두걸의 실험 이야기도 있고요.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의 책 제목은 과거형입니다. 그렇다면 책의 저자는 이제 환생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환생을 믿지 않았던 사람, 그것도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훈련해온 신경정신의학자인 저자가 환생을 믿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이 책에서는 풀어놓고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브라이언 와이스는 1988년 이 책의 초판을 출간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까지는 4년의 망설이는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일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신약리학 분야의 명문 마이애미 대학교의 종신교수로 있으면서, 꾸준히 연구하고, 논문을 펴내며 명성을 쌓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탄탄대로를 걷는 정신과 과장이 환생에 관한 책을 세상에 낸다면, 그간 쌓아온 성과가 단번에 무너져 내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지요. 더구나 그 때는 스스로가 의사이자 학자이며 보수주의라는 좁은 길에 들어선 때였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뭐든지 부정했습니다. 견고하지만 보수적인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하고 환생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캐서린이라는 환자를 치료하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치료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나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떤 손길이 내려와 내 인생의 방향을 돌이킬 수 없도록 바꾸어놓았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것들, 그토록 조심스럽게 따지고 끊임없이 회의하며 읽어온 모든 책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캐서린의 기억, 캐서린이 전하는 메시지는 모두 사실이었다. 나의 직관은 줄곧 캐서린이 경험하고 있는 사건들 속에 전혀 오류가 없다고 판단해왔고, 그 직관은 옳았다. 내 앞에 사실이 놓여 있었다. 증거가 놓여있었다.


캐서린의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모든 치료방법을 동원한 끝에 아무런 효과가 없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이 최면요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최면치료 과정에서 전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목격합니다. 자기가 보고 경험한 것, 그것의 가치를 꼭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펴낸 이 책은 90년대 후반 전 세계적인 전생 신드롬을 일으키며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밀리언셀러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남아 2019년에도 다시 이렇게 발간되었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 저 먼 인간 정신의 세계. 그것은 정신의학계의 거성 카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처럼 존재하고는 있지만 현대의 과학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영역일 것입니다. 하지만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더구나 사후세계 이야기가 흘러오는 통로인 최면요법은 사실 과학적인 치료술의 한 가지입니다.

최면요법은 오랫동안 묻혀온 환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된다. 최면에는 신비로운 구석이 전혀 없다. 최면이란 일종의 정신집중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브라이언은 캐서린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증의 기원을 찾기 위해 최면 요법을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캐서린의 어린 시절을 뒤져봐도 증상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답답해진 브라이언은 직접적인 질문을 합니다. 캐서린의 증상은 질식에 대한 공포와 통제할 수 없는 불안 증세였습니다. 브라이언이 최면 상태에 든 캐서린에게 별 기대 없이 그것을 처음 일으켰던 때로 가보라고 하자 ‘그 일’이 시작됩니다. 과학적인 치료 기술을 통해 ‘그 일’이 시작된 겁니다.

기원전 1863년 그리스 여성, 아론다의 삶. 그녀는 그 삶에서 물에 관한 비극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캐서린은 물에 대한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캐서린은 최면과정에서 떠올리게 된 자신의 전생을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있었던 일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환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터무니없어 했다는 겁니다. 캐서린의 체험적 진실은 자신이 받은 교육과 신앙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작가 브라이언은 과학자답게 문헌을 찾아봅니다. 비교종교학 문헌에서는 원래의 구약과 신약에 환생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서기 325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어머니가 환생에 대한 언급을 삭제한 사실이 나옵니다. 그리고 환생이라는 개념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구원의 기회가 여러 번 부여됨으로 교회의 권위가 약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당시 평민이나 농노가 환생의 개념을 알면 곧 현생을 포기하고 자살해버려서 노동력이 부족해질 거라는 것이 삭제의 이유였습니다.

종교학 이 외에서도 브라이언은 닥치는 대로 과학자가 쓴 환생에 관한 문헌들을 섭렵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사례를 연구한 레이먼드 무디 박사의 책 『다시 산다는 것』을 비롯해 환생과 관련된 기억이나 경험을 가진 어린이들의 사례를 2천 건 이상 수집한 정신의학자 이안 스티븐슨 박사의 저술을 탐독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문헌보다도 그의 환자인 캐서린의 말을 통해 그는 믿게 됩니다. 이 생의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 저 생이 있고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특히, 브라이언 박사의 삶에 묻혀진 가장 큰 슬픔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 그 의미를 캐서린이 설명할 때, 그는 기적을 만난 듯 전율합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는 우리에게 통찰력이나 예지가 없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리다 보면 이유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생애와 생애의 중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최면 치료를 통해 여러 생을 탐색(?)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삶의 가난과 배고픔, 노동 그리고 죽는 순간의 고통, 외로움, 공포까지 다시 겪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애가 끝나고 다음 생애가 시작되기 전에 영혼이 쉬는 그곳에서 캐서린은 더욱 높은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 이상의 자아, 상위 자아가 전해주는 말이 전해주는 진리는 종교적 가르침 같기도 하고 그 이상 같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집니다. 인생이란 서둘러 꾸려나갈 수 없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삶은 끝이 없기에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변화의 여러 국면 속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끝은 없습니다. 인간은 여러 차원 속을 살고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얻은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길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 상태에 있는 동안 몇 가지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입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캐서린의 영혼은 무려 여든 여섯 번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그것이 배움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하는 일도 주로 배우는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하나의 삶 전체를 통틀어 배우는 겁니다. 예를 들어, 캐서린이 2차 대전에서 폭격으로 죽은 독일 공군 조종사였던 삶이 있습니다. 바로 그 죽음 이후, 캐서린의 영혼은 그 삶의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이유도 없이 증오하는 사람들과 무분별한 살상의 대가였습니다. 또,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죽어버려 혼자 굶주리다 죽어버린 우크라이나 어린이의 삶에 대해서는 사람에 대해 경솔한 판단을 경계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 아이의 인생이 아버지에 대한 섣부른 판단으로 짧고도 힘들게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명확한 결론이 좀 의아했습니다. 삶 하나에 배움 하나? 배움을 얻기 위해서 이 전 생애를 바쳐야 하는 걸까요? 요즘 우스갯말로 치자면, 「too much」입니다. 지나치게 투입하는 자원이 많은 거지요. 우리의 온 생애, 우리의 사랑, 기쁨, 슬픔, 고통, 불안, 꿈, 노력... 그 모든 것이 영혼이 배움을 얻기 위해서 라고요?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불합리한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런 죽음들이 일일이 어떤 배움을 위한 것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책의 독자로서 모든 것을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해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브라이언 박사와 캐서린의 삶은 사후 세계를 이해하면서 확실하게 변해 갑니다. 짜증을 잘 내던 저자는 아들과의 나들이에서 차가 아무리 막혀도 여전히 다정하고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교통체중은 곧 끝날 것이고 자신은 아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적, 삶의 배움을 이해한 그에게 일상의 긍정적인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캐서린의 경우에는 좀 더 영적이고 비범해지게 됩니다. 정신과 진료실 의자 위에서 전생을 다시 경험하고 상위 자아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볼 줄 알게 된 그녀는 일종의 성인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모르는 사람들도 그녀의 남다른 기운을 느끼고 다가서게 될 정도지요.

캐서린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한껏 즐기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고, 더는 정신적인 불구로 비틀거리지 않는다. 캐서린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행복감과 만족을 누리고 있다. 질병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인생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것임을 알기에 자신과 조화하고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캐서린은 내면의 평화를 발산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도 독자들의 삶이 당장 특별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 곳곳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교훈들은 계속 곰씹어보게 됩니다. 제가 이 책에서 특히 좋아하는 교훈은 어떤 인간도 특별히 더 위대하지는 않다는 개념입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개념은 신분제 사회에서나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에서나 공허한 구호가 되기 쉽습니다. 저자도 그것에 관해 이렇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셨지만 명백한 모순들이 우리의 얼굴을 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품성과 기질이 다르고, 부와 권리가 다르고, 무수한 것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대답을 듣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찾아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름이 한 자쯤 되는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합시다. 이 다이아몬드에는 천 개의 면이 있는데, 이 면들에 먼지가 앉고 때가 끼어 있습니다. 그 면 하나하나를 깨끗이 닦아서 표면이 반짝이고 무지갯빛을 반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혼의 임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면을 닦아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몇 개밖에 닦지 않아 초라한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먼지와 때를 벗기고 나면, 모두가 가슴속에 천 개의 면으로 찬란히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다이아몬드는 완벽해서, 단 하나의 흠도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깨끗이 닦인 면의 수입니다. 모든 다이아몬드는 똑같으며, 모두 완벽합니다.
모든 면이 깨끗이 닦여 빛의 스펙트럼을 발하게 되면, 다이아몬드는 본래의 상태였던 순수한 에너지로 돌아갑니다...모든 다이아몬드는 완벽합니다.”
<끝>

(1)인간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는 가설로,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서 의사로 일하던 던칸 맥두걸(Ducan Macdougal)이 1907년 의학 저널 《아메리칸 메디슨》에 처음 제기한 이론이다. 던칸은 죽음의 순간에 인간의 체중을 측정하였는데, 이때 약 21g 정도가 가벼워지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의 무게라고 보고 영혼이 물리적인 특징을 지닌 물질이라고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21그램 가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목차>
프롤로그
01. 첫 만남이 이루어지다
02. 전생의 기억을 말하다
03. 사후의 경험을 말하다
04. 나의 과거를 말하다
05. 메시지를 전하다
06. 변화가 시작되다
07. 관계가 드러나다
08. 여행이 계속되다
09. 용기가 생기다
10. 원인이 드러나다
11. 멸망을 예언하다
12. 신과의 합일을 말하다
13. 소통의 비밀이 밝혀지다
14. 작별을 고하다
15. 영매를 찾아가다
16. 신비체험이 시작되다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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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글샘도서관 (☎ 055-330-2991)
최근 업데이트 :
2018-12-06 09:5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