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루이뷔통
제주는 바람이 많이 분다.
그리고 길도 비탈지고 돌이 많아 여인네들이 육지처럼 머리에 짐을 이고 다
니지를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등에 짐을 진다.
감저(고구마)를 수확하고는 헌 구덕에 잔뜩 넣고는 지고 집으로 향한다.
촐(억새)를 베고 이동할 때, 바당에 물질하러 갈 때, 고기 팔러 시장에 다닐
때, 심지어 애기 업고 밭에 갈때도 그녀들은 구덕에 자신들의 생활을 담는다
가끔은 촐령 다닐(잘 차려 입은, dressed up)때 그녀들의 구덕은 옆구리에 있
다.
마치 지금의 세련된 핸드백이 어깨에 메어져 있는 것처럼....
이 구덕은 대부분 장방형이나 방형 형태로 원재료는 대나무이다.
대나무는 가볍고 또한 습기가 많은 제주에서 내구성이 강해서 그리고 제주
도 전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어 구덕을 만드는데 아주 좋은 재료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바당에 괴기(바다에 고기) 낚으러 갈 때 옆집에 대나
무를 잘라서 청대(낚시대)를 만들곤 하였다. 그리고 더 단단한 것으로는 소살
(작살)을 만들어 고기를 쏘기도 하였다.
현대의 여성들은 늘 핸드백을 갖고 다닌다.
이 핸드백은 자신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간단한 화장품이나 일상에 필
요한 것들을 넣고 다니곤 하는데 옛날 할머니, 어머니들이 핸드백인 구덕을
지고 다니다는 것은 곧 삶의 무게, 무거운 현실을, 게다가 그것이 무거운 줄
도 모르고 습관처럼 지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13세살 때 물질을 시작하면서 촐구덕을 지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구덕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뉜다.
곤대 바구리(고는 대구덕)는 구덕중에서 여인네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모슬갈 때(당에 정성드리러 갈 때, 타지 경조사에 참가
할 때) 그리고 오일장에 옷 사러갈 때 주로 어머니들이 갖고 다닌다.
구덕들 중에 그래도 가장 노동의 개념의 덜한 것이다.
제 기억으론 구덕 자체로 굉장이 평범하게 이뻤던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어릴 적에 어머니가 시장이나 외방(출타)에 갔다
올 때 보따리를 걷어서 떡이나, 먹을 것, 그리고 새옷등을 꺼내서 어머니가
주셔서 항상 좋은 추억이 시작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이 구덕은 일년생 미만의 대나무로 촘촘하게 만들어서 매끄럽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와 올래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 삼남
매는 뛰어나가거나 어머니가 올 때 즈음 올래 입구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곤
하였다.
할머니나 어머니는 대부분 이 구덕을 등에 지고 다니기보다는 옆구리에 끼
고 다니셨다.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물질적인 인자함, 관대함 뭐 너그러움은 이 곤대 바구
리에서 시작되었다.
촐구덕은 여인네들의 노동의 시작을 알린다..
상군(최고의 해녀)이 되기 전 바당에 물질하러 다니면서 주로 이용을 했다.
물질해 서 잡은 것은 갖고 다니기도 하지만 바당 고띠( 깊지 않은 물가)에서
고동, 보말, 고메기 등을 잡을 때 항상 옆에 가지고 다녔다.
곤대바구리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질구덕 보다는 작고 대나무가 조금은 투박
하고 넓다.
바당에서 잡아온 성게나 해산물을 촐구덕에 담아 시장에 가서 팔았다.
평상시 제주 아낙내 들이 바다나 밭에서 일할 때 그리고 일을 마치고 이동
할 때 대부분 같이 다닌다.
마을 해녀들이 출구덕이나 질구덕을 지고 몇몇이 같이 돌담길을 사이로 게
끗띠(해안가)으로가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남아 있다.
질구덕(지는 구덕)은 그저 여인네들이 힘든 노동의 상징이다.
이는 크기도 곤대 바구리 보다 크기도 클 뿐만 아니라 굵고 넓은 대나무로
투박하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물건을 많이 담아서 한꺼번에 많이 옮길 때 주로 사용을 하였다.
해녀가 상군인가 하군인가를 겉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촐구덕을 지느나
질구덕을 지느냐 이다.
어머니는 시집을 오고나서 항상 물질하러 다닐 때 질 구덕을 지고 다녔다고
한다.
매역을 조물어(미역을 따서) 등에지고, 물질한 구정귀(소라)나 귀(성게)를 담
곤하였고, 지들커(땔감, 이나 마른 풀)을 질구덕에 넣고 물질을 끝내서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곤 하였다.
이 질구덕의 무게로 대부분의 여인네들의 허리와 등이 휘어진다.
지금도 허리가 굽은 할머니 어머니를 보면 여간 마음이 짠하다.
물구덕은 허벅을 놓고 물을 길러다니기 위해서 만들어 진것으로 다른 구덕
에 비해 허벅이 높이가 있으며 제주말로 조금 소랑한 편(가는편)이다.
마을 근처에 산물이나 우물이 큰 곳 한 두게는 꼭 있어 (실제로는 여러곳이
있었지 만 가장 짠맛이 덜하고 물량이 풍부 한곳, 집에서 약 1km 정도에 소
금밭 근처 위치) 여인네들이 사나흘에 한번은 여러번 물 길어서 마당이나 정
지(부엌)에 물 항아리에 담아 두어 사용을 하곤 하였다.
어머니는 아주 이른 새벽에 물을 길러 다니셨다.
이른 아침에 물이 깨끗할 뿐 아니라 늦게 가면 물을 다 떠가거나 더러위서
그리고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이른 시간에 나 섰다고 한다.
새벽 3-4시에 잠든 우리 모습을 뒤로 하고 몇 번을 갔다 오고 해서도 우리
삼남매 는 곤히 자고 있었다고 한다.
이른 새벽에 물을 길으러 가는 것은 참으로 무서웠다고 한다.
우물가 근처에는 항상 도채비(귀신)이 나타나는 곳이었고 밤에는 항상 죽은
애기울음 소리가 끄치질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창용이 어멍(어머니)이 물길러 갔다가 오다 도채비를 만나 허둥지둥 집
으로 돌아 와보니 물허벅에 가득 채웠던 물이 반도 없었다고 한다.
가끔 우리가 그 노동을 조금 줄여 줄 수 있는 것은 비가 올 때 바가스(바켓)
에 지붕에서 내리는 물을 받아 물항아리에 담는 것이다.
애기(아기)구덕은 말 그대로 애기 구덕이다. 할머니때에는 애기구덕에 촐(풀)
을 깔아 애기를 눕히곤 했는데 어머니시기에는 주로 삼베를 밑에 깔았다곤
했다.
여인네들이 애기를 낳고 요즘 같이 산후 조리란 개념도 없이 다음 날부터
일하곤 했다.
애기 구덕을 지고 밭에 나가 그늘에 애를 두고 검질(잡초)를 메거나 밭일을
하면서 동시에 애를 보고 젖을 물렸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서는 발로는 애기
구덕을 흔들면서 애를 재우고 손으로는 바느질을 했다.
그야 말로 몸의 일부라도 쉬는 데가 없었다.
(야속하게도 남자들은 무엇을 했느지 뭔)
우리 삼남매 전부는 애기 구덕에서 컸다고 한다.
내 아들은 쇠로 만든 애기 구덕에서 컸는데, 이것은 손잡이가 있어 그나마
애를 흔들며 재우기가 편리하였다.
가끔 어머니가 와서 아들을 재울 때 편안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아들의 눈을
바라 보며 자장가를 불러 주시곤 했다.
“ 자랑 자랑 엉이 자랑 우리 애기 잘도 잔다 ..... ”
바구리는 촐구덕이나 곤대 바구리가 시간이 많이 지나 헤어 지고 구멍나서
두꺼운 종이나, 헝겊등으로 땜방을 하고 거기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넣어
두고 집안 한구 석이나 고팡(부엌 한구석이나 따로 한 공간에 잡동사니를 보
관하는 곳)에 보관을 하였다.
추운 겨울날 마당에 땅을 파고 눌(저장소)에서 감저(고구마)를 갖고와 쪄서
먹곤 했는데 눈이 오는 날에는 한꺼번에 많이 꺼내 바구리에 나두고 이틀에
한번씩 감저를 구워먹고, 삶아 먹곤 했다.
곤대는 고운, 아름다운 뭐 그런 의미이다.
구덕은 대부분 여인네들이 사용하는 것인데 유일하게 남녀 공용으로 쓰인
것이 송동바구리이다.
특히 남자들은 여름에 바당에 괴기 낚으러 갈 때 이 송동 바구리를 양쪽으
로 작은 구멍을 내 끈으로 허리춤에 차고 괴기를 낚어서 두곤 했는데 더운
날에는 너무 밖에 오래 있으면 괴기가 거의 몰라버려(말라버려) 낚시를 하면
서 송동바구리가 주로 바닥이 물이 닿을 정도의 높이에서 낚시를 하곤 했다.
어머니는 바당이 센 날 물질을 못하면 썰물 때 이 송동 바구리에 보말과 고
메기를 가득 잡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뻽바농(바늘)로 보말과 고메기를
깠다.
제주 연인네들은 구덕을 끼고 살았다. 그 구덕 또한 제주 여인네들처럼 조용
하고 질긴 삶이었다. 집집마다 용도에 맞게끔 다양한 구덕이 있었다.
어릴적부터 우리집 건물 벽면에는 늘 태왁과 그 옆에 촐구덕, 질구덕이 걸려
져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는 허벅이 자리잡고 있었고, 언제 부터인가 허벅이 없어지고,
지금은 태왁과 촐구덕 질구덕 모두가 사라졌다.
어머니가 나이가 올해 85세이시다.
이미 10여년 전에 구덕 사용하는 것을 멈추고 오직 모슬갈 때만 드문드문
곤대바구 리를 사용하고 그것도 이제는 대부분 집안 한구석에 걸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져 가고 있다.
그래도 이 다른 구덕과 비교해서 이 곤대 바구리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다
면 육체적으로 덜 지친, 조금은 여유있는 삶을 사셨을 텐데 아마도 어머니는
질구덕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고향집에 걸려 있는 곤대 바구리는 30년이 지났지만 바닥이 조
금 헤져있지만 대체로 생생한 것이 조금은 안스러워 보인다.
여동생이 한 육 칠년에 “ 오빠 어디 갔다오당 어머니 조그만 가방이나 하
나 상 옵서게 ” (어디 다녀오다가 어머니 조그만 가방 하나 사서 오세요)
“ 무사?” (왜?)
“ 왕 보난 들렁다니는 좋은 가방 하나 어싱게 마쓰 경허고 오빠가 사다 주민 막 좋아 헐거우다 게 ” (와서 보니 들고 다니는 좋은 가방 하나도 없고 그러고 오빠가 사다 주면 어머니가 매우 좋아한다고)
“ 게메이 우린 어멍이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
(그러게 어머니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그해에 외국 갔다 오다 면세점에서 작은 손가방을 사다 드렸는데, 사실은
백은 프라다도 아니고, 구찌도 아니고 루이뷔통은 더더욱 아닌, 환하게 밝은
여러개의 꽃무늬가 그려진 가벼운 made in Thailand 가방이었는데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시던 얼굴이 선하다.
그리고는 작년 말까지 해녀증, 핸드폰, 반 접은 지폐, 동전등 잡동사니를 들
고 다니시다가 그리고 노인당에 가서든, 물리치료를 받으려 다닐 때 마다 우
리 아들이 외국 갔다 오다가 무슨 면세점에서 샀다고 자랑도 많이 하셨는데
그만 지퍼가 고장 나서 더이상 들고 다니시질 않는다.
“ 야 외국에 언제 감시냐? ”
(외국에 언제 가니?)
“ 무사 마씨 ?”
(왜요?)
“ 아니 갔다 오당 그 가방 호나만 다시 사당 오라 그거 막 좋더라게 ”
(아니 가다 오다 그 가방 하나만 다시 사서 오라 그거 매우 좋다)
“ 예 알아수다 ”
그 이야기를 하고 여러 번을 더 밖으로 갔다 왔는데도 한번은 잊어 버리고
또 한번은 비행시간에 쫓기느라 못 사다 드렸다.
어머니는 그것에 한번도 서운한 감정을 비추신 적이 없다.
지금은 그전에 쓰셨던 것을 다시 꺼내 갖고 다니신다.
내가 참 무심하게 느껴진다. 한정판 명품백도 아닌데....
똑 같은 것을 찾느라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를 했지만....
다음에 나갈 때는 꼭 그 태국 산이 아니더라도 더 좋은 것으로 사다 드려야
겠다.
고향집에 걸려 있는 어머니의 곤대 바구리뿐만 아니라, 지나간 모든 구덕들
은 우리들에게는 어머니와 함께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킨, 손자들에게 사랑
을 쥐어 준 그야 말로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 그리고 삶의 무게를 이겨낸,
어떠한 루이뷔통 백보다 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명품백이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구덕, 이 곤대바구리는 고향집 벽면 한쪽에,
늘 거기에 있어 왔듯이 앞으로도 다시 사용할 날이 있다는 듯이 그렇게 걸
어져 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의 정상과 사랑의 우리 가슴에 걸어져 있듯이.
paravims@naver.com
제주의 정서, 우리의 정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5월초 “ 어머니의 루이뷔통” 이란 제목의 책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합니다. 많은 기대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미리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