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 후라이드 껍데기>
“쟤는 누구야? 무슨 중학교 팀에 초등학생 같은 애가 있니? 작아도 너무 작다 우리 팀은 저 아이 때문에 질 것 같은데.”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들어 왔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뿌리치기 위해서 매일 매일 누구보다 열심히 농구 연습을 해왔다. 아니 농구가 좋아서이다. 김해에 하나밖에 없는 농구클럽도 농구에 대한 내 열정을 따라오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주말에도 코치님에게 부탁해서 연습했다. 새로운 농구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더 잘하는 형들 반에 넣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코치님은 나를 부담스러워 하셨고 3년 넘게 다닌 클럽을 그만 두었다. 이후에도 동영상을 보며 기술을 익히고 동네 공원의 농구코트는 내 방이 되었다. 농구공은 나와 함께 하는 친구이다.
이 책의 주인공 아놀드도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태어났을 때부터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차 있고 머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데다 키에 비해 발은 280cm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치아도 많아 보기 흉하고 눈도 나쁜데다 언어 장애까지 있다. 식구들은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잠으로 저녁을 대신할 만큼 가난한 인디언 소년이다.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왕따를 당하기도 쉽고 무시당하기도 일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인공 아놀드는 인생에서 자그마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큰 기쁨을 준 사람들, 좋아하는 목록들을 하나 둘 늘인다. 아놀드에게는 이 모든 슬픔을 걷어줄 구명보트가 그림이었다. 나에게 농구가 그렇듯이 말이다.
나의 꿈은 농구선수다. 하지만 키도 덩치도 너무 작고 말랐다. 그런데도 꼭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 ‘나 같은 아이가 키도 크고 덩치도 산만 한 아이들을 밀쳐내고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아이들 보다 더 잘하는 게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들 때마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아놀드는 달랐다. 친구하나 없는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2m 족히 넘는 거구를 상대로 주먹을 날려 코피를 나게 한다. 가장 친했던 스포캔 부족의 로디라는 친구의 오해와 배신도 이겨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죽음의 이별도 담담히 받아낸다. 나는 ‘와’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놀드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놀드는 모든 것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울하지 않다. 솔직하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겨낸다.
“전 세상은 인종, 민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늘 생각했어요, 흑인과 백인으로 인디언과 백인으로. 하지만 이제 그게 틀렸다는 걸 알았어요. 세상은 늘 딱 두 개의 부족으로 나뉘었다는 걸 알았어요. 개자식 같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우리는 자신이 선택 할 수 없는 국적이나 피부색 등을 가지고 인종차별을 하거나 그 사람이 내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나도 많다. 빈부의 차, 외모, 신체적 장애 유무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무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키가 작은 것, 그래서 좋아하는 농구를 하는데 불리하지만 놀림을 받을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아놀드처럼 남들이 생각하는 단점이라는 것을 있는 대로 받아드리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기회로 삼는 것이 옳다. 리어단 학교의 코치 선생님이 하신 말처럼 무엇을 하든, 인간의 삶은 자신의 장점에 얼마나 전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은 자신이 보는 각도만큼 편견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아놀드 할머니, 유진 아저씨, 학교 선생님의 따뜻한 도움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힘을 키운 것이다.
이제는 나보다 신체조건이 좋은 모든 이들과 당당하게 일대일 농구를 신청한다. 아니 농구는 키로 하는 경기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과 경기하기를 제안한다. 신체적 조건이나 처한 환경에 불평하고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나 자신과 하는 일대일 농구를 신청하는 것이다.